크레파스 공장이다. 은빛 기계들 옆에 긴 철제 테이블들이 놓여 있다. 하얀 보자기를 덮은 그 테이블들 위에, 스댕 쟁반에 담긴 노릇한 과자와 와인 잔에 담긴 노란 쥬스가 있다. 싸구려들로 급조된 것이지만 어쩐지 그것 나름대로의 온정이 느껴진다.
스크린에 무언가를 비추며 행사가 진행된다. 이 크레파스 공장은 과거에 가난한 초등학생들에게 크레파스를 무료로 나누어 줬었다. 그리고 오늘은 어른이 된 그 아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다. 나는 이 공장으로부터 크레파스를 받은 적이 없는데 여기에 왜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자리를 지킨다.
한 사람씩 일어나 마이크를 잡고 한 마디씩 한다. 이 공장에서 받은 크레파스 덕분에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이 공장에서 받은 크레파스 덕분에 세상의 따뜻함을 느끼고 열심히 살았다 등 상투적인 말들이다. 진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공장과 그들을 마음껏 경멸한다. 이깟 행사를 개최한 공장의 빤한 의도와 시혜 의식이 역겹다.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기라도 한 것마냥 굽실대는 그들의 꼬락서니가 우습다.
어떤 놈들은 그 때 받은 크레파스를 가져왔다며 자랑스레 꺼내 보인다.
"이것 보세요! 너무 소중해서 거의 쓰지도 않고 새 것처럼 보관 중이에요!"
'세상에!'
20년이 넘은 크레파스가 20일도 되지 않은 크레파스 같다. 100색쯤 되어 보이는 데 3색쯤 사용한 것 같다. 통은 얼마나 닦아댔는지 갓 출고된 상품 같다.
'아니, 꿈을 키우고 열심히 살았다며?'
'초등학교 미술 수업만 성실히 따라갔어도 저것보단 더 낡아야 할 것 아닌가!'
"세상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온다.
'공장 직원들도 기암할 노릇이겠군. 어쩐담.'
그들의 표정을 살피니, 웬걸. 웃음이 만개한다. 이걸 어떻게 여태 갖고 있었냐, 이걸 어떻게 이 상태로 보관했냐 호들갑이다. 너도 나도 크레파스를 받아 들고 요리조리 살피며 키야~를 연발한다.
공장 직원들을 한심해하려는 찰나, 그들의 눈빛을 본다. 순식간에 성인이 되어 품을 떠난 자식이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품에 안길 때. 그 때의 애틋함과 반가움이다. 그들에게는 크레파스가 그들의 과거, 그들의 영광, 그들의 삶인 거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때 그 초등학생들이 어떻게 자랐건, 어떻게 살았건 관심 조차 없는 것이다. 당연한 거다.
감사의 의미라며 누군가 노래를 부르는데 되도 않는 노래다. 노래가 아주 훌륭하다며 모두가 환호한다. 진심인지, 격려인지 모르겠다.
엄마가 나를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려는 낌새다. 공장 직원들 눈치를 보며 엄마를 끌고 어두운 구석으로 간다. 노래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서서 이야기를 한다.
"엄마, 제발 나 버리지마. 응? 내가 잘할게. 제발 나 버리지마. 나 버리고 가지마. 응? 제발, 제발‥"
눈물을 흘리며 빈다. 이렇게 빌어도 엄마가 떠날 것 같아 불안하다. 대형 캐리어를 옆에 세워 둔 엄마는 팔짱을 끼고 있다. 귀찮은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눈물을 흘리다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