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2017. 8. 11. 11:47

05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시장에 내다 판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건전한 사회≫에서 발췌)


(...) 인간은 자신의 정신 활동이 자발적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특정한 조건에서 다른 사람이 그에게 주입한 것일 수도 있다 (...) 우리의 사고, 감정, 의지의 내용이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며 진실로 우리의 것이 아닌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가짜 활동이 일반적이고, 진짜 정신 활동 혹은 타고난 정신 활동은 예외라는 인상마저 받게 된다. (...)


어부는 날씨에 의존하며 살았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고민을 시작할 것이다. 바람의 방향과 기온, 습도 등등이 일기예보의 기초로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알기에 어부는 다양한 요인을 비교하고 검토하여 상당히 확실한 판단을 내릴 것이다. 어쩌면 라디오에서 들은 일기예보를 떠올리고 그것이 자신의 생각과 같은지 다른지도 언급할 것이다. 예보가 자기 생각과 다르다면 특별히 공을 들여 자기 의견의 근거들을 따져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은 - 이 지점이 중요하다 - 그의 의견이다. 그의 생각이 낳은 결과다.


두 피서객 중 첫 번째 사람은 날씨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고 굳이 많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라디오를 들었는데, 일기예보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또 한 사람의 피서객은 다른 유형이다. 그는 실제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날씨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우리에게 '그의' 의견을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라디오의 일기예보와 일치한다.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바람의 방향, 기온 등을 보고 자신이 그런 결론을 내렸다고 말한다. 겉으로 보면 이 남자의 태도는 어부의 태도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의 대답을 조금 더 자세히 분석하면 그가 라디오의 일기예보를 듣고 발아들인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자신의 의견이 분명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신이 권위자의 의견을 그냥 반복할 뿐이라는 사실을 잊고, 자신이 고민해서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고 확신한다. 그는 주어진 상황을 근거로 스스로 의견을 형성했다고 착각한다. 실제 그가 제시한 근거들은 가짜 근거들에 불과하다. 그가 스스로의 고민을 거쳐 자신의 의견에 도달했다는 인상을 일깨우는 데 기여하는 가짜 근거들인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의견을 형성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 그는 권위자의 의견을 받아들였을 뿐이며, 그 과정을 스스로 깨닫지 못할 뿐이다. (...)


사람들에게 다른 주제, 예를 들어 정치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아도 같은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


미적 판단에서도 우리는 같은 현상을 목도한다. (...)


사람들이 명소를 찾을 때도 실제로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사진으로 수도 없이 보았던 풍경에 불과한 경우가 적지 않다. (...)


비판적 사고의 억압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 아이는 아직은 어떤 비판도 허용하지 않을 엄마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아빠가 허약해서 믿고 의지할 수도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비판적 사고를 억누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주 빠른 시간 안에 (...) 아이는 비판적 사고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그 능력을 간직하리라는 희망도 없고 또 간직하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


이 모든 사례에서 중요한 것은 사고가 자기 생각의 결과, 즉 자기 행동의 결과인가 하는 점이다. 사고의 내용이 옳은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 사고의 허위성이 반드시 비논리적 사실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 허위성은 어떤 행위나 감정이 실제로는 비합리적이고 주관적인 요인에 좌우되지만 그것을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근거로 설명하는 합리화에서 밝혀낼 수 있다. 합리화는 사실 혹은 논리적 사고의 규칙과 모순될 수 있지만 그 자체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경우가 적지 않다. 합리화의 비합리성은 그것이 스스로 유발했다고 착각하는 행동의 실제 동기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비합리적 합리화의 좋은 예로 잘 알려진 유머가 있다.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 유리병을 빌렸다가 깨뜨렸다. 이웃이 유리병을 돌려달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첫째, 나는 유리병을 벌써 돌려주었고, 둘째, 나는 그 유리병을 한 번도 빌린 적이 없으며, 셋째, 유리병은 내가 빌려왔을 때 이미 깨져 있었어요."


'합리적' 합리화의 예도 있다. 경제적으로 힘든 처지의 A가 친척 B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B는 그 청을 거절하면서 그가 A에게 돈을 빌려주면 A의 경솔함만 더 심해질 것이고, 늘 딴 사람에게 의지하려는 성향만 부추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B가 A에게 절대로 돈을 빌려주고 싶지 않아서 한 말이기 때문에 그 말은 합리화다. 설사 B가 자신은 A의 안위를 걱정한다고 믿더라도 그의 행동은 사실 돈 욕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어떤 주장이 논리적인지의 여부만으로는 그것이 합리화인지를 확실히 알 수 없다. 그 사람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동기도 함께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당사자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자신의 적극적 사고에서 나온 생각은 항상 새롭고 독창적이다. 여기서 독창적이라는 단어는 그 생각을 그보다 먼저 한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생각을 한 사람이 외부 세계나 자기 자신에게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한 도구로 자신의 생각을 이용한다는 의미다. 합리화의 본질에는 이런 발견과 폭로가 없다. 합리화는 그저 우리의 감정적 선입견을 확인할 뿐이다. 합리화는 현실로 나아가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소망과 기존 현실을 일치시키려는 사후의 노력일 뿐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결심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며, 외부의 힘이 강요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무언가를 원할 경우 그것은 자신의 의지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확신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품는 큰 착각이다. 우리가 결심하는 것의 대다수는 실제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외부에서 암시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결심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타인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대로 행동한다. 그 이유는 고립이 두렵기 때문이며 우리의 삶, 우리의 자유와 안락이 직접적인 위험에 처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


정신분석을 추가로 진행하면서 억압한 것들이 계속 드러났다. 청년은 아버지에 대한 강한 분노의 감정을 발견했고, 의사로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감정이 그의 삶 전반을 관통하는 무력감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의식의 표면에서는 삶을 자기 계획대로 꾸려나간다고 믿었지만 더 깊은 곳에서 그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체념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느낀 것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다고 확신했으며, 남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에 맞추어 행동할 수밖에 없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근본적으로 결코 의사가 되고 싶지 않았고, 재능 부족이라 여겼던 것도 실은 수동적 저항의 표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는 어떤 사람이 개인의 소망을 억압하고 남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 자신이 그것을 바란다고 상상하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원래의 소망이 있던 자리를 가짜 소망이 차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든 원래의 사고, 감정, 의지의 행위가 가짜 행위로 대체되면 결국 가짜 자아가 원래의 자아를 대체하게 된다. 원래의 자아는 모든 정신적 활동의 진짜 장본인이다. 가짜 자아는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자아의 이름으로 연기하는 대리인에 불과하다.


물론 한 사람이 많은 역할을 맡을 수 있고 그 역할 모두가 '그'라고 주관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그는 이 모든 역할에서 사람들이 그에게서 기대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대부분이 부정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서 원래의 자아가 가짜 자아의 손에 완전히 질식당한다. 꿈에서, 상상에서, 취한 상태에서 원래의 자아가 살짝 나타나기도 한다. 오랫동안 억눌렸던 감정이나 생각이 나타나는 것이다. 때로 그것들은 그가 겁이 나거나 부끄러워 억압해 버렸던 나쁜 것들이기도 하지만, 비웃음을 받거나 비난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억압해 버렸던, 그가 가진 최고의 것일 때도 많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나는 이 관계는 마케팅 지향이라 불렀다. 이런 방식으로라면 인간은 자신을 시장에 성공적으로 배치된 사물로 느낀다. 스스로를 행위의 장본인, 인간의 힘을 가진 자로 느끼지 못한다. 그의 목표는 시장에서 이윤을 남기고 자신을 판매하는 것이다. 그의 자존감은 사랑하고 생각하는 개별 인간으로서의 자기 활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역할에서 나온다.


사물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넌 누구니"라는 질문에 타자기는 "나는 타자기야."라고 대답할 것이다. 자동차라면 "난 포드야." 혹은 "난 뷰익이야." "난 캐딜락이야."하고 대답할 것이다. 인간에게 "넌 누구니?"라고 물으면 "난 회사원이야." "난 의사야." 혹은 "난 유부남이야." "난 두 아이의 아빠야."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해당 사물의 대답이 갖게 될 의미와 상당히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스스로를 사랑과 공포와 확신과 의혹을 느끼는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서 특정한 기능을 담당하는 진정한 본성에서 소외된 추상으로서 느끼는 방식이다.


인간의 자긍심은 그의 성공에 달려 있다. 그가 이윤을 남기고 자신을 판매할 수 있느냐 (...) 판매하려고 내놓은 인격은 가장 원시적인 문화에서조차 인간의 특징으로 꼽히던 존엄성의 상당 부분을 잃을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스스로 소외된 인간은 자아감 전체를, 즉 스스로가 되풀이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라는 느낌을 거의 상실할 수밖에 없다. 자아감은 스스로를 나의 경험, 나의 사고, 나의 감정, 나의 결정, 나의 판단, 나의 행위의 주체로 느끼는 데에서 탄생한다. 그러자면 나의 경험이 실제로 나 자신의 체험이자 소외된 체험이 아니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사물은 자아가 없다. 사물이 되어버린 인간은 자아를 소유할 수 없다.


현대인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고 생각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외부의 족쇄를 벗어던졌다. 자신이 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지만 알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할 자유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것을 모른다. 그래서 익명의 권위에 의지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자아를 받아들인다. 또 그럴수록 더 무력감을 느끼고 순응을 강요당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모든 낙관주의와 피상적인 진취성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Posted by Русалк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