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2017. 8. 13. 21:57

1부 읽기


(...) 아버지의 죽음은 내 생애의 큰 사건이었다. 그것은 어머니를 사슬로 묶고 내게는 자유를 주었다.


세상에 훌륭한 아버지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일반 법칙이다. 남자들이 나쁜 탓이 아니라 부자 간의 관계란 원래 고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뭐랄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이를 소유하겠다니 그런 당치 않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만일 나의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내 위에 벌렁 누워서 나를 짓누르고 말았으리라. 다행히도 그는 일찍 죽었다. 안키세스를 업은 아이네아스들이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나는 혼자 강을 건넌다. 일생 동안 자식의 등에 매달려 있는 그 보이지 않는 아버지들을 미워하면서. 젊어서 죽어 미처 내 아버지 노릇을 할 기회가 없었던 한 사나이, 지금 같으면 내 자식 정도의 나이밖에 안 될 그 사나이를 나는 내 뒤에 멀리 버려 놓았다. 그것이 좋은 일이었는지 나쁜 일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초자아(超自我)가 없다는 어떤 유명한 정신 분석가의 판단에 나는 기꺼이 동의하겠다.


사람은 그냥 죽기만 해서는 안 되며 알맞게 죽어야 한다. 만일 아버지가 더 늦게 세상을 떠났더라면 나는 죄의식을 느꼈으리라. 철이 든 고아(孤兒)는 부모의 죽음을 제 잘못으로 돌려 스스로를 탓하는 법이다. 자기가 보기 싫어서 부모가 일찍감치 천국의 아파트로 물러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무척 기뻤다. 남들이 나의 처지가 불쌍하다면서 나를 존중하고 떠받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의 상실을 나의 한 가지 이득으로 여겼다. 아버지는 고맙게도 자신의 잘못으로 죽었다. (...)


명령하는 것과 복종하는 것은 똑같은 짓이다. 가장 권위 있는 지배자라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아버지라는 거룩한 기생자(寄生者)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리고, 자기가 겪은 추상적 폭력을 남에게 행사한다. (...)


나는 알맞게 죽어 준 아버지 때문에 자유를 얻었고, 줄곧 죽기를 기다리던 할아버지 때문에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


나는 어린애였지만 또한 어른들이 그들의 회한으로 빚어 놓은 괴물이었다. (...)


인간이란 의례적(儀禮的) 존재라는 것 등이다. 사람들은 내게 우리 모두가 서로 연극을 꾸미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타일렀고 나도 그 점을 인정했다. 다만 나는 그 주역을 맡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청천벽력에 망연자실한 순간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내가 가짜 주역을 연출하고 있음을 깨달은 때였다. (...) 할아버지는 자기의 죽음을 달래기 위해서 내 비위를 맞추었다. 그리고 내가 피우는 소란은 할머니에게는 그녀의 심술의 구실이 되었고 어머니에게는 죽어지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없었더라도 어머니의 양친은 어머니를 맞아들였을 것이며, 어머니는 그 고운 성품 때문에 할머니에게 무조건 복종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내가 없었더라도 할머니는 여전히 뾰루퉁했을 것이고, 할아버지는 마터호른이나 유성(流星)이나 남의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감탄했을 것이다. (...) 나 자신의 존재 이유는 오리무중이었다. 나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임을 별안간 깨닫고는, 이 질서 정연한 세계에 끼어든 나의 괴이한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것이었다. (...) 나는 여전히 추상적인 존재였다. (...)


비참한 형편 속에서 사는 어린애는 제 존재에 대해서 자문(自問)하는 일이 없다. 빈곤이나 질병으로 말미암아 육체적으로 들볶이면, 그의 정당화될 수 없는 상태가 그의 존재를 정당화해 주기 때문이다. 굶주림과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 자체가 그가 생존할 권리의 근거가 된다. 그는 죽지 않기 위하여 사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 사명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자부할 만큼 부유하지도 않았고, 욕망을 필수적인 것으로 느낄만큼 가난하지도 않았다. 나는 양분을 섭취한다는 의무를 다했고, 신은 내게 때때로 - 극히 드문 일이지만 - 역겨움 없이 먹게 해 주는 은총을, 즉 식욕을 베풀어 주곤 했다. 나는 무심하게 숨 쉬고 소화하고 배설하면서 살기 시작했으니 그냥 살아가는 것이었다. (...)


나는 공포 속에 살았다. 그것은 어김없는 신경증이었다. 그 원인을 캐 보자면, 그것은 하늘이 내린 귀염둥이로서 응석받이로 자라 온 내가 자신의 근본적인 무용성(無用性)을 느꼈다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집안의 관례라는 것이 억지로 꾸민 요식 행위로 늘 보였기 때문에 그 무용성은 더욱더 분명한 것으로 여겨졌다. 나는 내 존재가 군더더기라고 느꼈고, 따라서 마땅히 없어져 버려야만 할 터였다. 나는 시시각각으로 소멸 직전에 처한 시든 꽃이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고, 조만간에 형이 집행될 판국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사코 그 판결을 거부했다. 내 생존이 소중해서가 아니 반대로 생존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이 무의미하면 할수록 그만큼 죽음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되기 마련이다. (...)


모든 사람의 총애를 받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는 따돌림을 당한 나는 이를테면 팔다 남은 물건이었다. 내 나이 일곱 살에 기댈 곳이라고는 나 자신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 자신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Posted by Русалк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