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2017. 8. 11. 12:01

06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1937년 ≪사회 연구 잡지≫에 실린 논문 <무력감에 대하여>)


(...) 이들은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 질 수 있으며, 자력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이들은 항상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자신은 그 결과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깊이 확신한다. 이런 감정이 너무 진전되어 그 어떤 것도 바라거나 원하지 않게 되는, 자신이 애당초 뭘 원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보통은 자신의 소망이 있을 자리를, 타인이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에 대한 고민이 차지한다.


예를 들어 그들의 결정은 이렇게 하면 아내가 화를 낼 것이고 저렇게 하면 아버지가 화를 낼 텐데 하는 고민의 형태를 띤다. 결국 가장 화낼 걱정을 덜 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지만 원래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물어보지도 못한다. 그 결과 그들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타인에게 짓밟힌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그에 대해 화를 낸다. 하지만 짓밟힘을 당하도록 한 사람이 일차적으로 자신이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무력감을 깨닫는 정도는 그 강렬함의 정도와 마찬가지로 사람에 따라 차이가 크다. 무력감을 그 자체로 의식하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 능률과 사회적 기능이 너무 줄어들어 굳이 스스로에게 무력감이 아니라고 속일 필요마저 없어진 중증 신경증일 가능성이 높다. 무력감을 완전히 깨달을 때 생겨나는 정신적 고통은 아무리 과대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깊은 공포, 인생의 무의미함을 규칙적으로 느낀다. 무력감을 그 자체로 의식하지 못할 경우에도 중증 신경증에서는 동일한 결과가 나타난다. 따라서 무의식적인 무력감을 의식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후유증과 연계시키는 힘든 정신분석 작업이 종종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보통은 무력감을 의식하는 경우에도 그 정도는 전체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정신분석을 통해 드러난다. 대부분 무력감을 동반하는 깊은 두려움 탓에 아주 약화된 형태로만 무력감을 의식하는 것이다.


감정의 괴로움을 극복하려는 일차적 시도는 무력감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련의 합리화이다. 근거로 제공되는 합리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로는 다음의 것들을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자신이 무기력한 이유가 신체적 결함 탓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 사람들은 몸이 허약하여 조금만 과로해도 못 견디며, 이런저런 신체적 결함을 갖고 있고 '아프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심리적 이유에서 나온 무력감을 자신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고 원칙적으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신체적 결함 탓으로 돌리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다른 형태의 합리화는 특정한 인생 경험으로 인해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기에 모든 활력과 용기를 빼앗겼다는 확신이다. 어린 시절의 특정한 경험, 불행한 사랑, 경제적 파탄, 친구에 대한 실망을 무력감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정신분석 이론을 단순화시키는 탓에 이런 합리화가 많은 관점에서 더욱 수월해졌다. 다시 말해서 세 살 때 엄마한테 맞았거나 다섯 살 때 오빠에게 놀림을 당했기 때문에 무력해졌다고 믿도록 핑곗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 다른 형태의 합리화는 특히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는 상상으로, 혹은 실제로도 자꾸만 문제를 만들어서 절망적인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속수무책의 심정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성향이다. 이런 경우,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한 공무원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업무를 처리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책상에 앉아 자신이 무능하다는 기분에 젖어 있는 동안 머릿속으로 자신이 일자리를 잃을까 봐, 아내가 아플까 봐, 친구가 너무 오래 연락을 안 했다고 화를 낼까 봐, 방이 너무 추울까 봐 겁을 내고 있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결국 그는 무력감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적절한 항복처럼 보일 때까지 너무나 슬프고 절망적인 상황을 마구 지어낸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이런 성향이 상상에만 국한되지 않고 실제 행동으로까지 확장되면 더욱 치명적이다. 당사자는 정말 몸이 아프고, 상사를 도발하여 실제로 해고당하며, 아내와 언쟁을 시작하여 하루 종일 집안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이 성공할 경우, 견딜 수 없는 외부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자신의 무력감은 타당하며, 지극히 정당하다고 느낀다.

Posted by Русалк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