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2017. 7. 25. 14:57

04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발췌)


(...) 자발적 활동을 억압하여 진정한 개성이 발전하지 못하도록 침해하는 행위는 아주 일찍부터 시작된다. 실제 어린아이에 대한 첫 교육적 조치부터가 이미 그런 행위이다. (3~5세 아동을 대상으로 한 로르샤흐테스트의 결과를 보면 자발성을 지키려는 아이들의 노력이 아동과 성인 권위자의 주요 갈등 원인이다. A. Hartoch, 1956을 참고.) (...)


교육이 빈번하게 자발성의 말살로 이어진다. 그래서 독창적인 정신 활동들이 다른 종류의 감정, 생각, 소망으로 뒤덮인다. (여기서 '독창적'이라는 말은 어떤 생각을 그전에 다른 누구도 해본 적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생각의 기원이 그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 생각이 그의 활동, 그의 생각에서 나왔다는 의미임을 강조하고 싶다.)


약간 자의적이지만 거부감과 적대감 같은 감정들이 아주 일찍부터 억압된다는 사실에서 한 가지 예를 찾을 수 있다. 일단 대부분의 아이들은 주변 세계와의 갈등을 통해 일정 정도의 적대감과 반항심을 표출한다. 주변 세계가 아이의 팽창 욕구를 저지하려 하고, 아이들은 보통 - 더 힘이 약한 존재이기에 - 순응할 수밖에 없다.


교육과정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이런 적대적 충동의 제거이다. 아이에게 공포를 조장하는 위협과 처벌에서부터 아이에게 혼란을 유발하여 적대감을 포기하게 만드는 '매수'나 '설명' 같은 더 교묘한 방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그러면 아이는 더는 자기 감정을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않다가 결국에는 그 감정을 느끼는 것을 아예 포기한다. (...)


또 한편으로 교육은 아주 일찍부터 아이들에게 결고 '자기의 것'이 아닌 감정을 느끼도록 가르친다. 특히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무비판적으로 친절하며 미소를 지으라고 가르친다. 그래도 미처 교육이 다 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나중에 사회적 압력이 해결해 준다. 웃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 눈에 '상냥한 사람'이 아니다. 웨이트리스, 세일즈맨, 의사가 되어 서비스를 팔려면 상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육체노동 말고는 팔 것이 없는 사회 피라미드의 밑바닥 사람들과 제일 꼭대기 사람들만이 특별히 '상냥할' 필요가 없다. 친절과 명랑, 그밖에 미소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전기 스위치처럼 켜고 끄는 자동 반응이 된다. (...)




나는 모든 인간 존재는 어떻게든 진리를 갈망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진리에 대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외부 세계에서 방향을 찾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특히 어린아이의 경우 더욱 그렇다. 어릴 적에는 누구나 힘없는 단계를 거친다. 진리는 힘없는 사람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이다. 하지만 진리는 외부 세계에서 방향을 잡는 데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 내면의 강인함은 자신에 대한 진리를 아는지의 여부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환상은 지팡이와 같다.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도움은 되지만 그를 더 약하게 만들 뿐이다. (...)


우리 문화의 큰 부문은 하나의 기능 - 중요한 것을 가리는 것 - 밖에 없다. 문제가 너무 복잡해서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은 연막에 불과하다. 내가 보기에는 개인과 사회의 기본 문제 대다수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다. 이런 문제가 너무나도 복잡해서 그 분야의 '전문가'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중요한 문제에서 자신의 사고력을 믿고자 하는 용기를 - 심지어 의도적으로 - 빼앗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개인은 뒤죽박죽이 된 엄청난 양의 데이터 앞에서 망연자실하면서 전문가가 어떻게 할지, 어떤 길로 갈지 알려줄 때까지 무기력하게 기다릴 것이다.


그 결과는 두 가지이다. 일단은 말이나 글로 표현된 모든 것에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권위자가 말한 모든 것에 유아적인 믿음을 갖게 된다. 냉소주의와 순진함의 결합은 현대인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 결과 현대인은 자신의 사고를 하며 결단을 내릴 용기를 잃게 된다. (...)




'독창성'의 결핍은 감정과 사고뿐 아니라 소망에도 해당된다. 무엇을 바라는지 알아내기는 특별히 힘겹다. 현대인들은 - 무언가 있기는 하다면 - 너무 바라는 것이 많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지만, 모조리 다 가질 수는 없다고 여기는 것이 문제다.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가지고 싶은 것을 갖는 데 쏟는다. 그런 행동의 전제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묻지 않는다. 전제 조건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현대인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정말로 스스로 원하는 것인지를 고민할 시간을 내지 않는다. (...)


하지만 한 번 씩 이런 악착같은 노력을 멈출 때면 의문이 밀려들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 자리에 오르면, 더 좋은 차를 사면, 이 여행을 할 수 있으면 그 다음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이 모든 것을 원하는 사람이 정말 나일까? 행복해질 것이라고 다들 말하지만 이루고 나면 허망해질 목표를 좇아 달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이 떠오르면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 질문이 한 인간의 모든 활동, 즉 그가 원하는 것의 관념을 떠받치는 기틀에 의혹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불안을 조장하는 생각은 최대한 빨리 떨쳐버리려 노력한다. 그런 의문으로 괴로운 것은 그저 피곤하거나 기분이 울적하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원래 자기 것이라 여기는 목표를 계속해서 좇아간다.


이 모두는 진리의 관념이 모호하다는 증거이다. 현대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가 원하는 게 마땅한 것만 원한다.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가 -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 -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이는 인간이 해결해야 할 가장 까다로운 문제 중 하나이다. 완제품으로 제공된 목표를 우리의 것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악착같이 회피하려는 바로 그 과제인 것이다.


현대인은 모두가 '자신의' 목표라고 우기는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엄청난 모험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 하지만 위험과 책임을 감수하고 자기 자신의 목표를 정하는 데에는 심각한 공포를 느낀다.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증거라는 착각에 빠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배우나 최면에 걸린 사람의 행동보다 비자발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역할이 분배되면 모든 배우는 열심히 자기 역할을 연기한다 . 대본이나 세부적인 연기를 살짝 고쳐 즉흥적인 연기를 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에게 맡겨진 역할만 연기할 뿐이다.


우리의 소망이 - 우리의 생각과 느낌 역시 - 어느 정도까지 진짜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 우리의 외부에서 주어진 것인지를 깨닫기가 이렇게나 힘든 것은 권위와 자유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대의 역사를 거치면서 교회의 권위는 국가의 권위에 자리를 내주었고 국가의 권위는 양심의 권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에는 양심의 권위가 건강한 인간 이성과 여론이라는 익명의 권위로 대체되었고, 결과적으로 순응에 도달하였다. 공개적 형태의 낡은 권위를 벗어던진 우리는 우리가 새로운 종류의 권위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순응주의자가 되었지만 스스로가 의지를 가진 개인이라는 착각 속에서 산다. 이런 착각은 개인이 자신의 불안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도와주기는 하지만, 줄 수 있는 도움은 거기까지다. 근본적으로 자아가 너무 허약해졌기 때문에 인간은 무력한 느낌,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린다. (...) 인간은 타인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며, 그러느라 자유로운 인간의 진짜 확신의 근거가 될 자아를 상실했다. (...)


내게는 정체성이 없다. 타인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의 거울상을 빼면 자아란 없다. 나는 '네가 원하는 나'일 뿐이다.


이처럼 정체성이 상실되면 순응이 더욱 시급해진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할때만 자신을 확신할 수 있다는 의미다. 타인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으면 비난을 받아 더욱 고립될 위험에 처할 뿐 아니라 인격의 정체성을 상실하여 정신적 건강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타인의 기대에 순응하고,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체성에 대한 이런 회의를 침묵시키고 어느 정도의 확신을 얻는다. 하지만 그 대가는 크다. 자발성과 개성을 포기하면 삶은 좌절한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아직 살아있지만 그의 감정이나 영혼은 이미 죽었다. 계속 움직이긴 하지만 생명은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만족과 낙관론의 무대 뒤편에서 오늘날의 인간은 죽도록 불행하다. 실제로 그는 절망의 끝에 서 있다. 절망의 심정으로 개성이란 것을 붙들고 늘어진다. '다르고' 싶고 어떤 것을 '다르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칭찬을 알지 못한다. (...)

Posted by Русалк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