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2018. 3. 7. 11:34

최은영, 당신의 평화


'나에게는 너뿐이야'라는 메시지를 유진은 오래도록 들어왔었다. 기억이 시작되는 다섯 살, 여섯 살 즈음부터 유진은 정순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다. (...)

유진은 정순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노력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미있게 각색해서 이야기하기도 했고 정순이 웃음을 터뜨리는 지점을 찾아내어 비슷한 말과 행동을 하기도 했다. 정순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를 때 유진은 서늘한 안도감을 느꼈다. 


언제부터였을까. 정순이 유진에게 자신의 감정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유진은 정순을 사랑했으므로 그녀가 겪는 고통에 언제나 마음이 찢기는 경험을 했다. 유진은 정순에게 들었다. 아무도 없을 때 할머니가 정순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 아빠는 어떻게 정순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지, 아빠와의 결혼이 그녀에게 어떤 고통을 줬는지에 대해서.

"너는 속이 깊은 아이야." 정순은 말했다. 그녀의 말은 일견 맞았다. 유진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 자신의 마음속을 깊이 파내어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묻어야 했으니까.

  내가 누구한테 말하겠니.

  누가 내 얘기를 들어주겠니.

정순은 그렇게 말했다. 어린 시절에는 자기 존재에 대한 인정으로 느껴졌던 그 말이 시간이 지날수록 유진을 옥죄었다. 남동생이 태어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순은 아들에게는 자신이 겪는 괴로움을 시시콜콜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으므로 .


"여자가 박사면 뭐하니. 그렇게 유학까지 다녀온 애가 온전할 리도 없고······."

유진은 전화를 끊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저 중에 처녀가 몇이나 있겠니.' 정순은 텔레비전에 여자 연예인들이 나오면 그런 말을 했다. 그녀는 남편과 첫 관계를 할 때까지 성적으로 너무 무지해서 부끄러웠다는 이야기를 꽤나 자랑스럽게 했다. '다 주면 남자 마음은 변한단다.' '여자랑 다르게 남자들은 자기 성욕을 다스릴 수 없어.' 그런 말들 속에서 어린 유진은 성욕을 지닌 자신이 괴물처럼 느껴졌다.


엄마를 떼어내기 위해 유진은 최선을 다해 비정해져야 했다. (...) 나이든 자식이 부모를 떠나는 건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지면서도 마음으로는 엄마를 버렸다는 죄책감에 짓눌렸다.

독립 후 시간이 흐르면서 유진은 정순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게 되었다. 정순을 향했던 죄책감이 분노로 이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이의 작은 어깨에 그런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한 엄마에게, 또 엄마를 궁지로 몰아넣었던 가족들에게 유진은 무한한 분노를 느꼈다. 


"넌 내 유일한 친구야." 정순은 유진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딸이 있어 참 다행이야."

언제나 유진이었다. 정순에게 폭언을 퍼붓고 화풀이하는 할머니에게 불같이 화내며 맞섰던 사람은, 그런 이유로 아빠에게 뺨을 맞았던 사람은, (...) , 정순의 이유 없는 신경질과,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독한 말들을 받아줬던 사람은.

  전부, 유진이었다.

Posted by Русалк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