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행복론 - 삶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
제4장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에 대하여
우리 역시 대부분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얕은지, 개념이 협소하고 신조가 천박한지, 견해가 왜곡되고 잘못되었는지 제대로 알면 타인의 견해를 점차 아무렇지 않게 여길 것이다. 또한 그런 자를 두려워하지 않거나 그런 자가 하는 말이 자신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되자마자, 모두가 하는 말이 때때로 얼마나 하찮게 들리는지 경험으로 알면 타인의 견해를 아무렇지 않게 여길 것이다.
각자 현실적으로 자신의 견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지 타인의 견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 것이 행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인간이 공통으로 지닌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이라고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자긍심은 어떤 점에서 자신이 압도적인 가치를 지녔다는 것에 관한 확고한 확신임에 반해, 허영심은 이러한 확신을 타인의 마음속에서 일으키려는 소망이다. 허영심에는 그 확신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은밀한 희망이 수반된다. (...) 자긍심은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은 기껏해야 자긍심이 있는 체할 뿐이며, 억지로 떠맡은 역할이 다 그러듯 결국 분수에 맞지 않는다. 자신이 압도적인 장점과 특별한 가치를 지녔다는 확고하고 흔들림 없는 내적 확신만이 실제로 자긍심을 품게 해준다. (...) 자긍심은 확신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모든 인식과 마찬가지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겸양의 미덕은 변변찮은 사람에게는 그럴듯한 발명품일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값싼 종류의 자긍심은 민족적 자긍심이다. 민족적 자긍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런 사실로 자랑할 만한 개인적 특성이 부족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수백만의 사람과 공유하는 것을 굳이 손에 넣으려고 할 턱이 없다. 의미 있는 개인적 장점을 지닌 사람은 언제나 자국민의 결점을 보고 있으므로 오히려 자신의 민족이 지닌 결점을 가장 또렷하게 인식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무엇하나 자랑할 만한 게 없는 가련한 멍청이는 자기가 속한 민족을 자랑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붙드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힘을 회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국민 특유의 온갖 결점과 어리석음을 필사적으로 옹호하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주 논쟁을 벌였기 때문에 때때로 폭행을 당하는 일이 있었지만 의연히 견뎌 냈다. 한번은 그가 발길에 차였을 때 끈기 있게 참는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노새에게 차였다고 해서 노새를 고소하겠는가?(『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제2권 21장) 또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에게 "저 사람은 당신을 모욕하고 비방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더니 "아닐세. 저 사람이 하는 말은 나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닐세"(『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36장)라고 대답했다. (...)
오히려 모든 비난은 그것이 제대로 정곡을 찌르는 정도만큼만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아무리 가볍게 암시한 것이라도 그것이 맞으면 아무 근거 없이 매우 심하게 비난한 것보다 훨씬 더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에서 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비난을 받아도 의연히 무시할 것이며 그래야 마땅하다. 반면에 인간의 명예의 원칙은 자기에게 있지도 않은 예민함을 드러내, 자신이 받지도 않은 상처에 피로써 보복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자는 자신의 가치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남이 자신을 공박하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서둘러 그들의 입을 막아 버리니 말이다. 그에 따라 명예 훼손을 당해도 진정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면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이유를 설명해줘도 못 알아듣는 자는 태형이 제격일 것이다.
나는 그런 어리석은 자는 타인을 사살하기보다는 차라리 권총 자살을 하는 편이 낫다고 답하겠다.
"그대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질투가 침묵을 명할지라도 시샘도 호의도 없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우리 시대의 무뢰한과 마찬가지로, 세네카 시대의 무뢰한들 사이에서도 음흉한 침묵과 무시를 통해 열등한 것을 두둔하고 좋은 것을 대중에게 숨기기 위해 공적을 억압하는 기술이 흔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지금의 무뢰한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무뢰한도 질투심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는 것이다.
결국 누구든 자신과 동질의 종류만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범한 사람에게는 평범한 것이, 천박한 사람에게는 천박한 것이, 두뇌가 명석하지 못한 자에게는 혼란스러운 것이, 저능한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것이 동질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자신에게 완전히 동질적인 자신의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지적 무능에 대해 괴테가 말한 것처럼, 뛰어난 것을 알아보는 것도 드문 일인데, 그것을 인정하고 평가하는 일은 더욱 드문 일이다. 다른 모든 경우에도 그렇지만 이런 경우에는 지적 무능에 도덕적 열등함까지 곁들여진다. 그것은 질투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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