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無題

Русалка 2017. 6. 19. 03:13

초등학생 때의 하굣길, A가 나에게 미피 - 어쩌면 키티 - 학용품 세트와 편지를 건넸다. 순수한 나이었기에, 그 자리에서 편지를 꺼내 읽었다. 나를 좋아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주변 친구들한테 천방지축으로 떠들었다.

"야, A가 나 좋아한대!"

그 순간, 마중 나왔던 엄마가 나를 발견했다.

"친구가 너한테만 편지로 한 말을 그렇게 크게 이야기하면 안 돼. 너가 그러면, 그 친구 얼마나 창피하겠어."


일단 집에 왔다. 엄마는 A의 집에 전화를 했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A엄마는 이미 이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아들의 마음을 안 엄마가 아들을 도와준 것이었다. A의 순수한 마음과 귀여운 용기, 그리고 그 엄마의 따뜻한 배려가 느껴질 것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저는 이런 거 받을 수 없어요. 내일 우리 딸 편에 돌려보낼게요."

전화를 끊은 뒤, 엄마는 차가운 얼굴로 나를 불러 앉혔다.

"남한테 이런 거 받아오는 거 아니야. 내일 가서 돌려줘. 우리 엄마가 다른 사람한테 이런 거 받아오는 거 싫어한다고 해. 그리고 너도 더 이상 학교 가서 다른 친구들한테 A 이야기 하지마."

내가 이미 신나게 풀어헤친 미피 학용품 세트를, 엄마는 무심히 다시 포장하기 시작했다.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엄마가 무서웠다.


다음 날 등교하자마자 A를 찾아갔다. 보기 싫게 꾸깃해진 포장의 미피 학용품 세트를 도로 건넸다.

"우리 엄마가 이런 거 받지 말래. 다시 갖다 주래."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A의 멋쩍은 얼굴을 뒤로 하고, 그 반을 빠르게 나왔다.


A와는 멀어졌다. 복도에서, 급식실에서, 운동장에서, 아파트 단지 안에서 마주칠 때마다 불편했고, 심지어 중학생이 되어서도 어색했다.




중학생 때, 같은 학원에 다니는 B를 좋아했다. 사춘기 소녀의 짝사랑이었다. 그 사실을 엄마가 알게 되었다. 엄마는 진분홍색 도끼빗으로 나의 머리를 때렸고, 노란색 총채와 연두색 파리채나의 등과 엉덩이, 다리를 때렸다.

"내가 뭘 잘못했어? 놀러다니는 것도 아니고,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 혼자 좋아하는 건데."

"남자나 좋아하려고 학원 다녀? 오늘부터 가지마!"


그 때의 나에겐 가고 싶은 고등학교가 있었다. 거길 가려면 그 학원이 필요했다. 맞으면서 빌었다. 울면서 빌었다.

"잘못했어, 잘못했어. 나 학원 계속 갈거야, 제발 가게 해줘. 어? 엄마, 잘못했어."

엄마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학원에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네, 선생님. 오늘부터 우리 애 학원 그만려구요. 학원 보내놨더니 B나 만나고 다녀서요."

B와는 학년이 달라 학원에서 같은 반도 아니었고, 따로 만난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는 나의 휴대전화를 뒤져 - 매질이 아파 휴대전화 잠금을 풀었다 - B에게도 전화를 했다.

"너가 B니? 나 ** 엄만데, 우리 애랑 앞으로 연락하지 말아라."


충격이었다. 누군갈 좋아하는 걸 엄마가 알게 된다면 조금 쑥스러울 거라고는 생각해봤지만, 이렇게 두들겨 맞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또한 그 감정이 세상에 발가벗겨진 채 전시될 거라고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루이틀이 흘렀을까, 엄마는 갑자기 학원에 전화를 했다. "그 날 일은 죄송했습니다"로 시작된 대화는 "내일부터 다시 학원 보내겠습니다"로 끝이 났다. 나와 상의는 없었다. B 이야기를 하며 그만둔 터라 그 학원에 다시 가기 싫었다. 나의 감정과 나의 엄마가 수치스러웠다. 나를 알던 학원 선생님들과 학원 친구들은 B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나를 모르던 학원 선생님들과 학원 수강생들은 B 이야기로 나를 알게 되었다.


B와는 당연히 멀어졌다. 그런 거쯤은 이미 아무 상관 없었다.




대학생 때, C와 만났다. 성인이 되어 사귄 첫 남자친구였다. 의심 많은 엄마가 며칠만에 남자친구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엄마는 남자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물었고, 나는 성실히 답변했다. 엄마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엄마는 남자친구 C가 마음에 들지 않는거야, 아니면 누가 됐든 남자친구라는 존재 자체가 싫은거야?"

"남자친구라는 존재 자체가 싫어."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C와 약속이 있는 날이면, 엄마는 짜증을 내다가 결국에는 화를 냈다. 괴로웠다. 마치 엄마와 남자친구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것 같았고, 난 그럴 때마다 엄마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 뒤 D와 사귀고 있을 때의 일이다. D와 만나고 돌아오는 길, 비 오는 주말 저녁이라 평소보다 귀가가 늦어졌다. 10시쯤이었을까. 집 앞에 나와있던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화를 냈다. 그날은 무슨 마음이었는지 나도 화를 냈다.

"이제 그만 좀 해. 언제까지 이럴거야? 몇 살이 되어야 놓아줄거야?"

그러자 엄마는 주먹으로 나의 얼굴을 때리며 말했다.

"이 썅년이!"

"이 미친년, 여지껏 키워줬더니 엄마한테, 뭐? 그만 좀 해?"

그러곤 내 어깻죽지를 움켜쥐고 집으로 끌었다. 집 안으로 가는 것이 무서웠다. 이거 놓으라며 뿌리쳤지만, 이성을 잃은 듯한 엄마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20년 이상 살아 아는 얼굴이 많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 나는 참 처참히 엘레베이터까지 끌려갔다.


1년 뒤. 떨리는 목소리로 D와 이별했음을 알렸을 때, 엄마는 미소 지었다.